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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희 | 시간의 깊이

OCI미술관   I   서울
인간의 깊이

러닝셔츠 바람의 친근한 모습으로 TV를 보거나 밥을 먹는 한 인간이 있다. 이 인간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사는 동시에 숲속으로 들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등 환상적인 세계를 넘나들기도 하며, 때로는 어두운 사회적 사건 현장을 헤집고 다닌다. 정석희 작가는 특유의 인간상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 일상과 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치열하게 탐구한다. 이 인간은 작가의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데, 마치 이웃집 사람 같은 까까머리 인간의 모습은 작가의 자화상일 뿐 아니라 평범한 ‘우리 모두의 자화상’으로 비추어진다.

정석희는 우리의 삶과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들을 드로잉, 회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영상 작품으로 담아왔다. 90년대 초 청년기에는 두터운 질감의 표현주의적인 <대지> 회화 연작으로 작품을 시작했고,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근 10년간의 미국 생활에서는 주로 작가가 살던 도시와 실내 풍경을 모노톤의 드로잉이나 회화로 표현하여 대도시 안의 소박한 삶을 그려냈다. 목탄 드로잉 콜라주를 영상으로 만들어낸 작품 <A man in New York>(1999)을 시작으로 주로 목탄을 활용한 드로잉 여러 장을 하나의 영상으로 담은 ‘영상 드로잉(media for drawing)’을 시작했고, 이어 하나의 회화가 완성되기까지 캔버스 속 과정의 장면들을 엮어 영상으로 만든 ‘영상 회화(media for painting)에 집중했다.
‘영상 드로잉’과 ‘영상 회화’는 영상의 형식으로 만든 드로잉과 회화를 의미한다. 이는 정석희가 만들어 낸 용어로, 밑그림보다 완성된 이미지와 스토리가 더 중시되는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작품의 원천인 드로잉과 회화에 더욱 중요한 본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영상 드로잉은 여러 장의 드로잉을 이어서 하나의 영상으로 제작한 것이며, 영상 회화는 하나의 캔버스에 형상들을 덧입히고 지우는 과정을 사진으로 촬영한 후 이를 이어서 역시 하나의 영상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영상에는 종종 적절한 사운드와 텍스트가 첨가되기도 한다. 영상 드로잉과 영상 회화는 99년 이후 정석희 작가가 주력하는 핵심적인 작업 방식이며, 동시에 사진 콜라주 위에 드로잉을 결합하는 등 다양한 형식 실험도 이어왔다.
사실 정석희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풍부한 양의 작업들을 쌓아왔지만, 긴 해외 거주로 인해 국내에서는 청년기의 개인전을 제외하면 2006년의 개인전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OCI미술관에서의 이번 전시 <시간의 깊이>는 인간의 실존이라는 깊이 있는 주제 안에서 꾸준히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며 형식실험을 해 온 정석희 작가의 작품을 왜 현재에 더욱 중요하게 조명해야 하는 지를 공감하고자 기획되었다. 정석희는 주로 일상, 꿈의 세계, 인간의 고독과 소통, 각종 사회적 사건 등 현대인들이 쉽게 공감하면서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진지하게 탐구해왔다. 또한 작가의 작품은 하나의 영상 작품이면서도 회화의 느낌을 간직한 ‘회화성(繪畫性)이 짙은 영상’으로서 회화와 영상의 경계라는 중요한 지점에 있다. 이는 회화란 무엇인지, 현대 미술에서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점들을 제시한다.
전시 제목인 <시간의 깊이>는 정석희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특성을 시간이라는 요소에 비추어 통찰한 것으로서, 모든 인간은 유한한 시간 속에 살아가지만, 만약 우리가 작은 삶의 순간들을 끊임없이 성찰하려는 의지와 열정이 있다면 우리의 생각과 기억 속에서 무한한 깊이를 가진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석희는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지만 주어진 삶을 깊이 사유하고 꿈을 꾸는 “영혼의 깊이”가 있는 인간은 심연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작품으로 표상한다. 심연의 시간은 주로 정석희의 작품 속에서 일상과 상상의 이미지들이 뒤섞이며 빠르게 전개되는 장면들로 암시되며, 지우기와 그리기를 반복하는 영상 회화의 형식에 내재한 특성으로도 파악해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작가의 사유를 잘 드러내는 각종 드로잉과 대형 회화의 평면 작품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영상 드로잉과 영상 회화들이 다각적으로 연출된다. 정석희의 작품은 크게 드로잉, 회화, 영상 드로잉, 영상 회화로 구별할 수 있는데, 드로잉과 회화가 독립적인 작품인 경우도 있으며 대부분은 드로잉과 회화, 영상이 유기적으로 제작되고 전시된다. <시간의 깊이>에서는 모든 작업의 모태가 되는 2000년대 초의 미발표 구작들을 포함하여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근작들과 작가의 원숙한 내적 성찰이 돋보이는 올해의 신작들까지 한 자리에서 펼쳐 보인다.
전시의 첫 번째 섹션에서는 일상의 모습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삶의 본질을 꿰뚫는 서정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작품들을 선보인다. 일상과 관련된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관람자는 누군가의 일기를 엿보거나 집에 초대를 받는 것과 같은 친밀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두 번째 섹션에서는 폭력이나 억압에 관련된 동시대의 사회, 정치적 사건들을 다룬 보다 강렬한 작품들로 확장한다. 특히 이 부분의 작품들에서도 정석희 작가 특유의 풍부한 은유적인 이미지들을 살펴 볼 수 있는데, 이로써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더욱 깊이 공유하고 근본적으로 소통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일상(日常)과 환상(幻想)의 숭고한 접경
정석희의 작품들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성찰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 거창한 질문에 아주 작은 일상의 조각들을 엮어 대답하는데, 그의 작품들은 낡았지만 매일 닦아서 반짝이는 구두처럼, 세월의 흐름, 일상의 고단함, 고독함을 받아들이면서도 꿈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는 한 사람의 일기와도 같다. 소파에서 쉬는 시간, 아이를 키우는 일 등 특별할 것 없는 순간들을 위해 인간이 살아가며, 평범한 삶의 순간들은 무엇보다 ‘숭고’하다는 것을 작가는 종종 담담한 일상의 이미지들과 상상의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나타낸다. 작가는 다양한 색감의 회화도 제작하지만, 드로잉에는 목탄을 주로 활용하여 투박하지만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강조한다. 생명의 유한함, 숙명적인 고통, 작은 행복으로 함축되는 인간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정석희 작품에서 근본을 이룬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석희는 영상 드로잉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자신의 내밀한 삶의 순간들을 작품의 주제로 다루었다.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시작한 이러한 작품들은 누구나 돌아볼 만한 보편성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친근한 오브제인 ‘소파’를 통해 삶을 통찰하는 영상 드로잉 <소파 a Sofa>(2003)는 20여장의 컬러 드로잉을 영상으로 엮고 각 장면에 한 줄의 텍스트를 첨가한 대표적인 일기 형식의 작품이다. 창밖의 계절과 심경의 변화에 따라 드로잉의 색감이 달라지는데, 텅 빈 소파는 그곳에 앉았던 누군가의 삶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보는 이들 각각의 삶이 채워지도록 이끈다. 정석희의 ‘소파’는 단순한 사물의 의미를 넘어 삶을 함께 겪는 의인화된 오브제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2007년에 집중한 회화 연작 <소파>에서 소파에 누워있거나 고심하며 앉아있는 인물을 강조한 것을 통해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소파’로 대표되는 실내 풍경은 일상과 삶을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정석희 작가의 많은 작품에서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일상을 주제로 한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인생에서 반복되는 기쁨과 고난을 인내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2003년의 영상 드로잉 <소파>도 실제 작가가 가족의 중병, 생활고 등을 겪은 시기에 제작한 것으로서, 작품에서 삶의 그림자를 담담하게 녹여냈다. 영상 안에 첨가된 “Deep dispair(깊은 절망)”와 같은 텍스트에서는 시련을 마주한 인간의 괴로운 심경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만, 동시에 아이의 탄생에 감격하거나, 고통을 극복하여 안도하는 등 행복한 순간들도 나타난다. 이 작품을 비롯하여 정석희의 모든 작품들은 비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좌절하고 즐거워하며 삶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인생의 자연스러운 굴곡들은 <소파>를 비롯한 일상을 다룬 작품들에서 주로 서정적인 사운드와 차분한 텍스트, 창밖의 자연 풍경 등 잔잔한 아름다움으로 환기된다.
특히 정석희는 많은 작품들에서 일상의 장면들과 상상의 이미지들을 자연스럽게 결합한다. 이는 “고단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일상은 힘들지만, 열심히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숭고한 일이며 우리가 꿈을 꾸도록 하는 원천임을 나타낸다. 대표적으로 작품 <The Island>(2005)에서 작가가 실제로 촬영한 침실 풍경의 영상을 낮선 풍경을 그린 목탄 드로잉과 병치하거나, <The gate>(2005)에서 성경을 필사하는 손을 담은 영상을 초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마음껏 여행하는 인물 드로잉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현실과 꿈의 이중 구조를 강조한다. 일상을 촬영한 영상의 잔잔하고 평범한 느낌은 자동기술법적으로 흘러가는 상상의 드로잉 이미지들의 자유롭고 신비한 느낌과 대조가 된다. <The Island>는 고단하지만 소소한 행복을 지키는 삶과 상상의 세계로 넘나들고자 하는 욕망을 병치하였고, <The gate>는 종교적 삶을 살고자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인간의 모습과 역시 상상의 공간을 여행하고자 하는 갈망을 나란히 놓았다.
정석희는 때로는 어둡지만 절망적이지 않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음껏 꿈을 꾸는 삶을 그려낸다. 작가의 많은 작품 속에는 밥을 먹으며 TV를 보거나 소파에 지친 몸을 맡기는 모습, 초자연적인 힘(종교)에 의지하기위해 노력하지만 한계에 부딪히는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부족한” 모습들이 담겨있다. 그러나 영상 드로잉 <Untitled>(2010)에서 밥을 먹던 인물이 갑자기 우거진 수풀로 이끌려가서 유니콘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게 되거나 영상 회화 <The light variations>(2011) 속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작가가 별이 쏟아지는 푸른 바다에서 노를 젓게 되는 식의 다소 엉뚱하고 자유로운 전개를 통해 작가는 일상과 상상세계를 연결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매우 단편적이면서도 묘하게 연결되어있다.
밥이나 빵을 먹는 인물은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이미지로서, 상상의 세계로 넘어가기 전의 출발점과도 같이 주로 작품의 초반부를 장식한다. 밥을 먹는 인물 형상에는 “고단한 밥벌이”와 예술적 행위 사이의 딜레마 그리고 일상과 꿈의 간극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담겨있다. 이렇듯 정석희는 작품을 통해 삶을 유지하기 위한 밥벌이와 같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중요하게 암시하지만, 이와 더불어 꿈의 세계의 환상적인 장면들을 풍부하게 첨가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힘겹지만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이 있는 한 결코 비루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러면서도 정석희는 작품에서 허황된 꿈을 좇거나 현실을 도피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섬> 안에서 ‘아빠’하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강조하거나 낡은 소파를 떠나지 않는 것, 많은 영상 드로잉에서 상상의 세계를 여행한 인물이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 등을 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무게들을 상기시킨다. 망망대해로 출항하였다가 밤이면 고요하게 묶여있는 항구의 배들처럼 꿈을 꾸는 것은 가장 작은 일상의 구속이 있기에 가능하며, 일상과 꿈은 순환한다는 삶의 철학은 정석희의 작품에서 근본을 이룬다.

창밖의 세상, 소통하는 인간
정석희는 많은 작품들에서 마치 일기를 쓰듯 삶을 성찰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데, 초기 작업에서 좀 더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그려냈다면 2000년대 중후반부터의 작업에서는 종종 사회 속 개인의 삶, 소통, 사회, 정치적 사건들을 폭넓게 사유한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특정한 사회적 이슈들에 천착하기보다는 그 속의 인간 존재를 돌아보는 것에 집중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작품 속에서 작가의 생각을 시각 이미지로 강력하게 발언하기도 한다. 평범한 한 인간의 삶은 이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들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기에, 초기 작업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주제가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석희는 주로 권력이나 외부의 억압에 의해 상실된 것들에 귀를 기울인다. 대표 근작으로는 제주 강정마을의 구럼비 바위 파괴 사건을 다룬 <구럼비>(2014)를 비롯하여 세월호 사건을 다룬 <에피소드>(2014), 철원 노동 당사의 아픔을 다룬 <끝나지 않은 이야기>(2014)를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사건을 비교적 암시적으로 표상하지만, 분단의 문제를 강렬하게 다룬 작품 <The last wall begins>(2012)나 전태일, 독립투사, 용산 참사 등 역사적 사건들을 짚어보고 미래를 가늠하는 <Where>(2009)와 같은 작품에서는 직접적인 폭력과 파괴의 이미지를 노출하여 사건 자체를 보다 무겁고 날카롭게 통찰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사회적인 이슈들을 개인의 시각에서 이야기하듯 작품으로 표현하는데,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을 주제로 하지만 평범한 실내 풍경 속 한 인물의 여정을 따라 중간 중간 암시적으로 바다와 아이들의 형상을 삽입한다거나, 독립투사 등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면서도 잠이 든 한 인물을 클로즈업하며 마치 그의 꿈속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연출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시점에서 사건을 전달하는 듯 구성한다. 이로써 작은 개인과 그를 둘러싼 세상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더불어 정석희는 현실의 사회적 사건들을 다루면서도 신비로운 풍경과 이미지들을 다층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꿈의 세계를 연결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구럼비>에서 용천수에 사는 바위를 지키는 정녕을 그려 넣거나, <에피소드>에서 짐승을 타고 몽환적으로 사라지는 인물로 마무리하는 것,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서 이승과 저승을 잇는 영매를 상징하는 까마귀 떼를 그려 넣는 등 시공간을 초월한 다양한 상상의 이미지들을 혼합함으로써 사건의 시간과 기억을 복잡하게 엮는다. 예를 들어 작가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숲’의 이미지는 자연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를 상징하는데, 영상 회화인 <숲에서 길을 잃다>(2012)와 같은 작품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우리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지만 ‘숲’이라는 주제를 통해 다층적인 해석을 얻을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개인과 사회의 건조한 트라우마 사건들을 특유의 환상적인 이미지들로 확장하고 변형하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이끌어낸다.
굵직한 사회적 트라우마를 다룬 작품들 외에도 정석희는 보다 넓은 범주 안에서 사회 속 인간의 존재를 탐구한다. 실내 풍경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의 모습과 창밖의 다양한 풍경들을 대조적으로 묘사한 <소파-안과 밖>(2010) 회화 연작과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는 인물의 드로잉에 실제 사회, 정치적 상황에 관한 영상을 결합한 <안과 밖>(2012) 영상 드로잉을 대표로 하는 ‘안과 밖’ 연작은 개인이 어떻게 사회와 소통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또한 조선시대 종묘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왕의 역사가 아닌 민초들과 개인의 역사를 돌아보는 작품 <명멸하는>(2016)이나 폭력이 만연해지는 사회 속 개인의 내적 갈등을 나타낸 <까마귀와 밥>(2012)과 같은 작품들은 특정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보다 폭넓게 아우르는 것들이다.
2000년대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정석희는 작품의 내용을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영상 회화’를 더욱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는데, 그는 단순히 하나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영상화 된 회화’를 만들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을 표현할 수 있는 영상 매체를 활용하면서도 회화의 본질을 살리기 위해 작가는 흘러내리는 물감과 붓의 흔적, 종이의 결을 영상에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장면들을 엮어, 마치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손을 따라가는 것 같은 영상 회화를 구축해냈다. 사실 영상 회화는 “회화의 끝(완성)은 어디인가?”라는 작가의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정석희는 회화를 어느 시점에서 화려하게 완성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 인간의 삶에서 진실한 과정이 중요한 것처럼 회화도 지우고 덧입히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위해 영상 회화를 선택했다.
영상 회화라는 형식은 인간 삶의 유한성과도 관련이 있다. 완성된 평면 회화는 마지막 붓질만이 남은 화면으로, 이는 유일하게 우리가 볼 수 있는 이미지이다. 회화의 표면 아래에는 작가가 붓질을 시작한 장면부터 완성된 화면에 이르는 많은 층들이 있다. 정석희의 영상은 완성된 화면 안쪽에 있는 회화의 속살들, 시간의 흔적들을 펼쳐보듯 신비로운 느낌을 가져다준다. 마치 우리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변화되어 어린 시절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져있을 때, 사진 앨범 속 과거의 모습들을 살펴보면서 현재의 나의 존재를 다시금 복합적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또 과거 나의 모습을 타자화 하게 되는 묘한 경계의 존재인 나를 발견하게 되는 느낌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라는 고뇌를 담은 영상 회화 <늪>(2016)에서 고요하게 누워있는 인간의 형상이 어둠 속 반딧불로 점점 사라지는 것에서도 인간의 존재와 소멸, 삶의 유한함을 생각하도록 한다.
정석희의 영상 회화 속 무수한 장면들은 완성된 평면 회화 작품과 동일한 존재이면서도 시간적으로는 명확히 분리되는 파편들이다. 이는 열심히 변화하고 때론 완성된 듯 보이다가 다시 사라질 수도 있는, 시간에 맡겨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을 상기시킨다. 무수한 장면을 거쳐 하얀 화면으로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영상 회화 <끝나지 않은 이야기>(2014)나 모든 환상적인 장면들을 지나 하얀 깃털 하나로 마무리하는 <가벼운 변화들>(2011)과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은 정석희의 작품들에서 내용 뿐 아니라 영상 회화라는 형식 자체에도 깊이 암시되어 있다.

하나의 영상 속에 풍부한 이야기들을 엮어내기 위해 작가는 늘 오랜 시간 작업실을 지킨다. 한 장에서 시작된 수십 장, 수백 장의 드로잉들과 지우고 덧입히기가 수차례 반복된 회화의 화면은 작가의 손길에서 움직임과 생명을 얻어낸다. 삶의 어떤 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듯 작가는 하나의 장면이 마지막 장면인 것처럼 그려내지만 이는 영상 드로잉과 영상 회화 안에서 빠르게 스쳐가는 과정이 될 뿐이다. 영상 드로잉과 영상 회화는 시간을 배태한 작가의 삶의 기록이다. 작가는 일상의 순간들에서부터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들을 성실하고 예리하게 담아내면서도 닿을 수 없는 꿈의 세계를 대담하게 넘나드는 인간을 그려낸다. ‘그 인간’은 특별히 더 고독하거나, 뛰어난 사유를 하는 인간이 아닌, 평범한 밥벌이에 감사하고 병든 세상을 걱정하며 자유를 꿈꾸는 ‘체온이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그와 함께 여행하면서 자유로운 시공간 속에서 각자의 삶의 과정들을 다시금 펼쳐볼 수 있을 것이다.
김지예 (큐레이터)

전시 정보

작가 정석희
장소 OCI미술관
기간 2016-11-03 ~ 2016-12-23
시간 10:00 ~ 18:00
수요일 - 10:00~21:00 연장개관
휴관 - 매주 일요일, 월요일
관람료 무료
주최 OCI미술관
주관 OCI미술관
출처 사이트 바로가기
문의 02-734-0440
(전시 정보 문의는 해당 연락처로 전화해주세요.)

위치 정보

OCI미술관  I  02-734-04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45-14 (수송동) OCI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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