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 모든 이분법의 적대적 대립은 ‘자아와 타자’를 다루는 궁여지책이었는지 모른다. 내 안에 타자가 있다. 내 안에 괴물이 있다. 내 안에 속된 것이 있고, 혐오스런 것, 더러운 것이 있다. 아니 나 자신이 속되고 혐오스럽고 더러울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 구분 자체가 없는지 모른다. 이제 이것을 다루는 방식이 변해야 할 것 같다. 내 안의 그 이질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차별하고 격리하며 ‘타자화’ 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싸 안고 보듬어 줘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박웅규 작가가 우리에게 속삭이는 메시지는 그 ‘문제적 타자’를 공격하고 동화시켜 ‘자기화’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고 포옹하여 공존하게 하는 것이다. 그 구분이 현존한다면 그것을 폐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모호한 경계를 흔들어 유동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내 안의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