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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크로마 Mono Chroma

이목화랑   I   서울
김범중, 김명진, 하대준이 참여한 ‘Mono Chroma’ 전을 단순하게 요약한다면, 폴리크롬의 반대 항에 있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상과 서사가 있는 그들의 ‘모노크롬’은 1970년대 미술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요즘 다시 미술시장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추상적 모노크롬과는 차이가 있다. 한지 위에 먹, 아교, 흑연, 재, 블랙 제소 등이 여러 안료, 그리고 드로잉과 꼴라주에 이르는 여러 기법이 활용된 그들의 작품은 밝음과 어둠 사이의 무수한 중간단계를 활주하고 있는 무채색 회화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Mono Chroma’는 그들의 작품을 특징짓는 무채색을 가리키는 범주, 즉 과학 용어와 같은 중성적 용어에 가깝지, 역사적이거나 미학적인 용어는 아니다. 전시부제 안의 ‘모노’를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존재의 일의성’(들뢰즈)과 가깝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지배적인 규칙인 이분법이 아니라, 하나이자 다수인 세계관을 말한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존재의 함성]에서, 들뢰즈를 따라 존재의 일의성은 존재가 수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명확히 구분되지만, 모두 동등하며 존재론적으로 하나 인 것’(들뢰즈)을 말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하나의 유일한 목소리가 존재의 함성을 들려준다’고 한다. 가장 다채로우며 가장 차이화 된 모든 존재 양태들과 관계를 맺는 존재의 유일한 하나의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동등하게 감싸는 이러한 척도는 모든 사물들에게 있어서 같으며, 또한 실재, 질, 양 등에 있어서도 같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뿐 아니라, [의미의 논리]에서도 ‘실재적인 것을 위한 유일하고도 같은 하나의 존재’를 강조한다. 이러한 ‘존재의 일의성’은 흑백논리로 귀결될 수 있는 이분법을 넘어서, 진정한 다원주의를 향한 초석이 된다. 이분법의 전형적인 방식은 원본과 복제를 구별하는 재현주의이다, 무엇(자연)으로부터 무엇(언어)을 뽑아내는 추상 또한 재현주의 한 범주에 속한다. 추상은 여전히 참조대상과 관련되며, 구성(해체)주의를 통해서 극복된다.
전시의 세 작가에게도 흑 또는 백 대신에, 흑과 백 사이의 무한한 하나의 계열이 있다. ‘Mono Chroma’라는, 다소간 논란이 될 만 한 전시제목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작가들이 함께 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방향타를 말할 뿐, 이미 관념적 의미로 과포화 된 특정 사조의 덕을 보려는 것은 아니다. 요즘 서둘러 미술사적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70년대 풍의 단색화는 최소한의 실행과 최대한의 의미 부여가 만나곤 했다. 그때 관객 또는 독자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말과 사물의 무한한 거리를 느끼게 할 뿐인 오독부터 과대광고에 이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이후까지 70년대 단색화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많은 사조들이 부침했지만, 이제 ‘역사’라는 미명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는 유령들과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동일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들의 작품은 심신의 차원에서 극도의 수행성이 떠올려지는 순간에도, 이전 세대의 단색화를 특징짓는 관념성과 초월성과 거리가 있다.
그러한 관념성과 초월성은 객관세계보다는 객관세계를 향하는 주체의 의식에 과도하게 방점이 찍힘으로서 생겨난 태도이다. 그러나 주/객관의 ‘현상학적’ 합일 같은 등으로 대변되는 ‘지나치게 평화회복적인’(들뢰즈) 담론은 지배적 제도 속에 잘 안착해 있었던 그 세대의 삶의 조건에서 발원한 것은 아닐까. 기왕에 초월과 관념을 비판하는 자리이니만큼, 일상의 예와 비교해보자. 이 전시의 작품들은 한 덩어리의 밀가루에서 수많은 겹과 결을 가진 파이나 국수가 뽑혀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또는 하나의 평면으로 무한히 다양한 형태가 가능한 접지술과도 비교될 수 있겠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최초의 밀가루 덩어리는 굳이 클 필요는 없지만 엄청나게 끈기가 있어야 한다. 이 전시의 세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러한 끈기이다. 끈기는 실재라는 하나의 덩어리를 2개로, 4개로, 8개로...n개(또는 차원)로 증식시킬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물질과 육체가 만날 뿐이다. 여기에서 정신은 물질과 육체의 또 다른 국면일 뿐이다. 하나에는 전부가 들어있다. ‘모노’는 단지 하나가 아니라, 전체를 위해 선택된 말이다. 전체는 하나의 질서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의 집합을 말한다.
3인의 작가들은 ‘모노’라는 말을 붙여 최소화했지만, 그 안에서 구사되는 색의 계열의 무한대이다. 과학에서의 실험이 한정된 조건 속에서 선택된 구성요소들의 조합을 꾀하듯, 이들이 활용하는 무채색의 계열은 실험적이라 할만하다. 그들에게 실험은 장황한 장치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장치들에 너무 의지할 때 실험은 형식주의에 빠지고 만다. 중요한 것은 형식주의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실험하는 것이다. 요즘같이 표현적 도구가 다양한 시대에 금욕적이다 싶을 만큼의 조형적 선택은 최대한의 조합이 가능한 결정적인 구성 요소의 선택으로 보여 진다. 그들은 여러 잡다한 요소가 절충적으로 뒤섞여 있는 피상적인 다양성이 아니라, 한정된 조건을 최대한의 결과와 연결시킴으로서 극한의 다양함을 펼쳐 보이려 한다. 먹이나 연필 등 이 전시의 작가들이 활용하는 일련의 매체는 일단 검정 계열로 대변될 수 있는 무채색으로 다가오지만, 검정 자체가 다양한 색의 혼합으로 가능한 색인만큼, 그들의 ‘단색’에는 이미 수많은 색이 잠재해 있다.
각각의 작업은 그렇게 잠재된 수많은 색을 무채색의 계열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잠재성과 현실성 간의 역동적 관계는 형상이 있으면서도 재현주의에 기대지 않는 이 전시의 작품들 모두에서 발견된다. 3인의 작품들을 채우고 있는 무채색의 계열에서 흰색과 검정이라는 양극은 잠정적으로만 설정될 뿐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어떤 시공간으로도 호환될 수 있는 여백부터 어떤 검정보다도 더 어두운 검정이 자리하곤 한다. 그들의 작품에서 선과 면, 그리고 얼룩은 한지 바탕 면과 숨바꼭질을 한다. 한지에 가해진 다양한 기법은 시각을 넘어서 촉각을 자극한다. 다양한 촉감과 결합된 무채색은 다채롭게 다가온다. 그것은 눈/의식 보다는 몸/무의식에 호소한다. 시각을 현혹하는 색이 제한된 대신에 극대화된 촉각성은 연필이라는 바늘로 바탕을 긁는 듯한 드로잉(김범중), 아교를 활용하여 먹의 입자를 떠돌게 하는 기법(하대준), 먹으로 얼룩진 한지를 오려 붙이는 방식(김명진)을 통해 실행된다.

전시 정보

작가 김명진, 김범중, 하대준
장소 이목화랑
기간 2016-02-02 ~ 2016-02-23
시간 11:00 ~ 18:00
주말 - 11:00~17:00
휴관 - 월요일
관람료 무료
출처 사이트 바로가기
문의 02-514-8888
(전시 정보 문의는 해당 연락처로 전화해주세요.)

위치 정보

이목화랑  I  02-514-8888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94 (가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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