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자대학교
동양화
학사
계원예술고등학교
미술과
졸업
‘꽃병 시리즈’는 박물관에서 마주한 조각난 고려청자에서 비롯되었다. 복원된 청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내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거울처럼 다가왔다. 오래된 청자의 균열과 상처가 어느새 나의 모습과 겹쳐졌고, 알 수 없는 상실과 연민이 함께 밀려왔다. “나는 깨어지고 부서져 더는 제 역할을 다할 수 없어… 나는 곧 너의 모습이야.” 청자는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 앞에서 나는 조용히 답했다. “금이 간 그 모습 그대로도 여전히 아름답다.” 상실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니라 충만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 깨달음의 순간부터 ‘꽃병 시리즈’는 시작되었다.
꽃병은 본래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릇은 비어 있음으로써 제 기능을 가지며,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타자를 담아내는 자리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 비어 있음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의 상태다. 꽃이 활짝 피어나는 순간, 꽃병은 비로소 자기 역할을 실현한다. 나는 꽃병의 이러한 본질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을 떠올렸다. 형태와 색, 재질이 제각각인 꽃병은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인간 군상과 닮아 있다. 그 안에 꽂힌 꽃은 각자의 삶, 관계, 희망을 상징한다. 꽃병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되지 않지만, 꽃이 생명을 다할 때까지 지탱하고 품어내는 배경이 된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선한 역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완전한 꽃병이 아니다. 삶의 여정 속에서 금이 가고, 때로는 조각나며, 스스로를 잃기도 한다. 완벽하게 매끈한 꽃병이 아니라 흠집 난 채로 남아 있는 꽃병.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맑은 물을 담고 싶다. 매일의 생명의 물이 채워지고, 그 물을 통해 꽃이 끝까지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서 꽃병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라, 나의 질문과 응답이 된다. 나는 묻는다. “내 생명의 물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리고 그 물을 통해 회복과 품음의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꽃병 시리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자 삶의 방향에 관한 은유이다. 불완전함 속에서도 타자를 품을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상처를 안고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는 생명에 대한 믿음이 이 작업의 핵심을 이룬다. 꽃병의 표면에 새겨진 금과 균열은 단순한 파손이 아니라, 시간을 견뎌낸 흔적이자 삶이 남긴 서사다. 그 균열은 오히려 꽃병을 고유하게 만드는 개성이며, 나아가 삶의 불완전성을 존중하고 긍정하려는 태도를 상징한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상실과 회복이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다. 상실은 회복의 다른 얼굴이며, 깨짐은 새로운 충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고려청자의 균열에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의 보편적 서사를 담아내는 이야기다. 꽃병은 나 자신을 비추는 자화상이자, 동시에 우리 모두의 모습을 상징하는 그릇이다.
예술은 결국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다. ‘꽃병 시리즈’에서 나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금 붙들었다. 답은 완전무결함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채로도 서로를 지탱하고 꽃을 피워내는 삶의 태도에 있다. 꽃병은 그 자체로 부족하고 깨져 있지만, 여전히 물을 담고 꽃을 지탱한다. 나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 더 깊은 아름다움을 본다.
따뜻함은 완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흠집과 균열을 끌어안는 데서 비롯된다. ‘꽃병 시리즈’는 바로 그 따뜻함을 향한 기록이자 응답이다. 인간은 언제나 흠집 난 꽃병이지만, 그 속에서 피어난 꽃이야말로 삶의 의미를 말해준다. 그래서 나는 다시금 다짐한다. “금이 간 모습 그대로도 아름답다.”
Q.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어린 시절 제게는 화가 이외의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미술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했고, 그림은 제 삶의 중심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고 나니 현실과의 타협 속에서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며 숨가쁘게 달려왔습니다. 문화예술 강사로서 아이들과 성인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 자체로 보람 있었지만, 어느 날 학생들이 그려낸 순수한 그림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속에서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 순간, 가르침 뒤에 가려져 있던 제 목소리를 다시금 찾고 싶어졌습니다. 남의 그림을 돕는 손길이 아니라, 제 내면의 이야기를 화폭 위에 펼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길로 작품을 다시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제 작업 세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Q.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작품을 통해, 완전하지 않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금이 가고, 버려지고, 때로는 외면당한 것들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연민은 사실 부끄러워질 만큼 필요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존재 자체로 깊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꽃병 시리즈’는 바로 그 깨달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금이 간 꽃병, 조각난 청자는 상실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새겨놓은 흔적이자, 시간을 견뎌낸 존재의 증거입니다. 저는 그 불완전성 속에서 인간의 내밀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고자 했습니다. 꽃병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품고 생명을 지탱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비추는 은유입니다.
따라서 제 작품은 상처와 결핍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그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저는 그 과정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는 흠집 난 채로도 서로를 품어낼 수 있는가?” 제 그림이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Q. 주로 사용하시는 표현 방법과 스타일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주로 순지와 비단과 같은 투명하면서도 단단한 바탕재 위에 안료를 스며들게 하고, 그 층위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방식을 즐겨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은은하게 시작해 점차 깊고 묵직한 색감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중요한 호흡이자 사유의 시간입니다.
특히 알 수 없는 ‘깊이감’에 매료되어 있어, 그 깊이를 더 풍부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끊임없이 탐구해 오고 있습니다. 저에게 색은 단순히 표면적인 시각 효과를 넘어섭니다. 여러 번 겹겹이 쌓인 색의 농담은 시간의 흔적을 품고, 감정의 결을 담아내며, 결국 내면의 울림을 드러내는 매개가 됩니다.
투명한 발색에서 진한 채색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곧 제 내면의 리듬과 정서를 시각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면 속에 켜켜이 스며든 안료의 깊이는, 흔적을 남기며 살아온 제 시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제 작업은 단순한 색의 누적이 아니라, 시간·호흡·감정이 겹겹이 응축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Q. 가장 애착이 가거나 특별한 작품이 있으신가요?
저에게 Vase 001은 특별한 작품입니다. 꽃병 시리즈의 첫 시작이자, 제 작업 세계의 문을 열어준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그리는 과정에서 저는 오래도록 안고 있던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흠집 난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불완전함 속에서 나를 사랑하게 되는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유난히 행복했고, 완성 후에도 자꾸만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곤 합니다. Vase 001은 단순히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을 넘어, 제게는 자기 회복과 사랑의 출발점이 된 작품입니다.
Q.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저는 자연 속에서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색감, 생명이 자라나는 리듬을 마주할 때마다 제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자연은 늘 변하지만 동시에 변함없이 거기에 머무는 존재이기에, 그 속에서 저는 위로와 깨달음을 함께 경험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순간은 예배 중입니다. 내면이 고요히 집중되는 시간,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되는 경험 속에서 깊은 영감이 찾아옵니다. 기도와 묵상 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종종 제 작업의 핵심 모티브로 이어지곤 합니다.
결국 저에게 영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신앙, 자연의 숨결 속에서 조용히 건네지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Q. 앞으로 작업 방향은 어떻게 되시나요?
최근에는 새로운 **‘돌 시리즈’**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제 작업의 뿌리는 꽃병 시리즈에 있습니다. 꽃병이라는 주제를 한 번의 시선으로만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끝까지 밀어붙여 보고 싶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연작이 가진 힘이라고 믿습니다.
연작은 단일 작품이 줄 수 없는 지속성과 심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마주하는 과정 속에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의미가 떠오르고, 시간이 쌓이며 감정과 사유의 결이 달라집니다. 마치 계절마다 같은 나무를 바라보지만, 그 모습이 결코 같지 않은 것처럼요. 꽃병 시리즈를 이어가는 일은 제게 하나의 긴 대화이자,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해 가는 여정입니다.
앞으로 저는 꽃병을 축으로 삼아, 그 안에 인간의 내면과 삶의 서사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동시에 돌 시리즈를 통해서는 무게와 침묵, 흔들림 없는 중심에 대한 탐구를 이어갈 것입니다. 꽃병이 ‘품음과 관계’의 은유라면, 돌은 ‘내면의 버팀과 존재’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결국 제 작업은 이 두 흐름—꽃병과 돌—사이에서 교차하며 확장될 것입니다. 품음과 중심, 관계와 존재라는 주제를 후회 없이 탐구하며, 저만의 언어로 기록해 가고 싶습니다.
Q. 대중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저는 제 그림이 관람자들에게 위로와 쉼으로 다가가길 바랍니다. 화려하거나 거창한 메시지보다는, 조용히 곁에 머물며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작품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균열과 상처, 불완전한 순간들을 제 그림 속 꽃병과 꽃처럼 담담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앞에서 잠시 멈춰 숨 고르고, 작은 평안과 회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제가 바라는 최고의 기억일 것입니다.
Q. 작품 활동 외에 취미 활동이 있으신가요?
저는 주로 자연 속에서 멍하니 머무는 시간을 즐깁니다. 바람과 빛, 나무의 결을 바라보다 보면 오히려 가장 깊은 사유가 스며들곤 하지요. 또 차 안에서는 마음껏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일상의 긴장을 풀기도 합니다. 지인들과 함께 전시를 관람하며 대화 나누는 시간 역시 제게는 큰 즐거움입니다.
최근에는 조금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습니다. 바로 춤을 배워 보고 싶은 것이지요. 몸을 움직이며 표현하는 예술은 제 그림과는 또 다른 활력을 줄 것 같아 기대하고 있습니다.
Q. 작품 활동 외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현재 **‘전통채색화 달담’**이라는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공간은 세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문화예술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나다움’**을 찾아가는 시간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원하는지 놓친 채 살아가곤 합니다. 달담은 그런 삶의 틈새에서 잠시 멈추어 설 수 있는 곳이 되고자 합니다. 그림이라는 예술적 수단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만나고, 감정과 경험을 표현하며 다시금 자신을 세워가는 시간을 나누고 있습니다.
작업실에서는 소묘, 색연필, 수채화, 전통 채색화, 수묵, 비단 진채, 판화 등 다양한 표현 기법을 안내하고 있으며, 각자의 창작 의도에 맞는 방법을 함께 찾아가며 완성도 높은 작품 제작을 돕습니다. 현재는 특히 민화 기법을 활용한 정규반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미술 경험이 없는 분들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달담에서 좋은 인연들을 만나 함께 전시를 열고, 작은 울림이라도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