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석사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학사
[작가 노트]
파도를 기다리는 동안, 물 속에 손을 담그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먼 바다에서 물결이 시작되면 손에 닿는 밀도가 달라진다. 묵직하고 시원한 물 덩어리가 손바닥을 밀어내며 틈새로 빠져나간다. 그러면 직감한다. 파도가 오고 있구나. 약속이나 한 듯 수평선 위로 길고 선명한 줄이 다가온다. 태평양의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던 파도가, 양양 바다에 떠 있던 작은 인간에게 도착한 것이다.
가끔은 파도가 너무 커서 겁이 나 도망치고, 때로는 눈앞까지 다가온 기회를 허무하게 흘려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에게 꼭 맞는 높이와 세기의 파도가 찾아온다. 황급히 몸을 돌려 해변을 향해 팔을 젓고, 밀려오는 힘이 보드를 들어올릴 때 본능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파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날이 선 물살이 부서져 하얀 포말이 되기까지.
한바탕 신나게 파도를 타고 나면 어느새 나는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해 질 무렵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구슬땀을 흘리던 그 시절의 나로. 내가 누구였는지, 무슨 고민을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순간이 온다.
이 경험은 내가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지을 때 가장 밑바탕이 되는 감각이다. 자연과의 교감, 기다림의 시간, 본능적인 움직임, 그리고 순간의 몰입. 이 모든 것들을 바다에게서 배우고 있다.
캠핑 또한 그런 연장선이었다. 평창의 첩첩산중 목장에서 비에 젖은 숲을 바라보며 아득함을 느낄 때, 새벽녘 귀가 터질 정도로 지저귀는 새 소리에 눈을 뜰 때,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모닥불 앞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 도시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이 그림들은 내가 자연 속에서 경험한 자유로움과 따뜻한 유대의 시간을 담은 기록이다. 동물적 본능이 깨어나 거침없이 물살을 가르는 서퍼들, 거센 파도에 휘말려도 훌훌 털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 바다와 숲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순간들, 그리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유쾌한 감정들을 그려보았다.
파도를 그리는 일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매 순간 달라지는 물결의 형태와 질감은 고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파도를 감정처럼 표현하고자 했다. 묵직하고, 반짝이며, 때로는 흐릿하게 다가오는 마음처럼. 자료를 모으고 스케치를 한 뒤, 도자기와 캔버스 위에 색을 쌓아가며 바다의 리듬을 화면에 옮겼다.
나의 그림들을 통해, 바쁜 도시의 속도에 지친 사람들이 잠시 숨을 돌렸으면 좋겠다. 문득 바다나 숲이 그리워지고, 주말의 햇살이 기다려지는 기분이 들었으면 한다.
[작가 소개]
문요 Moonyo Lee
서핑, 캠핑과 같은 아웃도어 활동에서 느낀 감정과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을 한다. 몇 년 전 시작한 서핑은 삶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 체험의 순간을 회화, 그림책, 오브제 등의 매체로 표현하고 있다. 자연 속에서 느끼는 자유로움,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는 추억을 담고자 한다.
카이스트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면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쳤고, 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SI그림책학교에서 그림과 스토리텔링을 배웠다. 지금은 개인 작업을 하며 XR(확장현실)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조금은 허술하고 자유로운, 감정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2020 볼로냐 국제아동 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2020 상하이 국제아동 도서전 Golden Pinwheel Competition, Finalist
-2023 볼로냐 국제아동 도서전 Italian Excellence: Illustrations for Italo Calvino, Winner
-2024 파리 New Images Festival, XR Development Market Selected
-2025 파리 New Images Festival, XR Distribution Market Selected
웹사이트: moonyolee.com
인스타그램: @moonyo.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