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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임지은, 오픈갤러리 학예팀
(좌) 2008년 서울 서미갤러리에서 공개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의 진위 여부를 삼성특검팀이 조사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오마이뉴스 기사)
(우) 로이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 1964
몇 해 전, 삼성의 비자금과 관련되어 화제가 되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의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은 당시 아트 컬렉팅에 대한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미술작품을 수집하는 행위는 작품이 가진 경제적 가치를 이용한 투기와도 같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아트 컬렉터’라고 하면 수억 원 대에 이르는 유명한 작품의 경매가를 높이는 부호, 혹은 미술로 투기를 일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아트 컬렉터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과는 다른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술사 속에는 미술계 전반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친 아트 컬렉터들이 존재합니다. 미술품 구매에 중독 수준의 열성을 보였던 아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은 수천 년간 미술계를 이끌어나갔던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 중심지를 옮기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또 다른 아트 컬렉터 찰스 사치(Charles Saatchi)는 영국을 현대미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번 미술이야기는 이러한 아트 컬렉터들이 어떻게 해서 미술계를 변화시켰는지 살펴보고 그렇다면 국내 아트 컬렉터 문화는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1) 유럽에서 미국으로, 현대미술을 이동시킨 아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격정적인 액션 페인팅과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차분한 색면 추상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는 현재까지도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미국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사조입니다. 이후로도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Andy Warhol)로 대표되는 팝아트,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를 필두로 정립된 미니멀리즘 등 현대미술의 주요 무대는 미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처음부터 미술계에서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대륙의 발견 이후 전개되기 시작한 미국이란 나라는 자본주의와 함께 경제적으로는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짧은 역사로 인해 문화예술 면에서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어떻게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요? 그 배경에는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한 아트 컬렉터의 활약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좌: 페기 구겐하임 (출처 : ArtStack / https://theartstack.com)
우: 베니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페기 구겐하임 (출처 : 네이버 영화)
페기 구겐하임은 미국에서 광산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구겐하임 가의 아버지와 금융업 갑부인 셀리그만 가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1912년 페기가 불과 13세가 되었을 때,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했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해오던 페기는 불안정한 내면을 달래기 위해 예술에 빠져들었고 후에 집안으로부터 물려받은 어마어마한 유산을 바탕으로 아트 컬렉팅을 시작하며 공허한 마음을 채워갔습니다.

그러던 페기가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에 대한 열정과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곳은 바로 유럽이었습니다. 그는 1920년대 젊은 나이에 프랑스로 건너가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했는데, 당시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남아있었으며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예술가들은 전쟁으로 인한 허무주의에서 착안한 ‘다다(DADA)’1) 와 같은 전위예술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격정적이고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예술적인 영감이 넘쳐흐르던 시기에 페기는 전위예술 작가들과 친분을 맺으며 유럽의 현대미술을 온몸으로 느꼈고, 그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특히 훗날 개념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될 뒤샹에게 컬렉팅과 갤러리 운영에 있어 많은 조언을 받았습니다. 뒤샹은 페기에게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을 구분하는 법과 같은 기본적인 미술 지식부터, 페기가 1937년에 개관한 런던 구겐하임 존느 갤러리(London Guggenheim Jeune Gallery)의 실질적인 운영에 이르기까지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이때부터 1941년까지 유럽에 머무는 동안 페기는 뒤샹을 비롯해 비평가, 시인 등 재능 있는 예술계 인사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자신의 컬렉션을 완성해나갔습니다.
좌 : 막스 에른스트, <Attirement of the Bride (La Toilette de la mariée)>, Oil on canvas, 1940
우: 콘스탄틴 브랑쿠시, <Bird in Space (L'Oiseau dans l'Espace)>, Polished brass, 1932–40
(이미지 출처 : http://www.guggenheim-venice.it)
1939년, 페기 구겐하임의 컬렉터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이 닥쳤음에도 페기는 “하루에 한 점씩 작품을 샀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작품 구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독일군이 파리에 주둔하던 때에도 파리에 있던 현대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를 찾아가 작품을 구입하는 과감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 통에서 누구도 미술작품을 챙기려고 들지 않았지만 페기는 꾸준히 작품들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심화되자 페기는 자신이 후원하고 친분을 맺었던 유럽의 작가들을 미국으로 피난시켰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럽의 초현실주의 작가인 막스 에른스트, 한스 벨메르,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등이 있었으며 이 중에는 유럽 초현실주의의 주창자인 앙드레 브르통도 있었습니다. 페기는 작가들과 더불어 작품 또한 안전하게 이송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피난 활동에 도움을 주던 비상구조위원회에 50만 프랑을 기증하여 금전적인 후원을 하기도 하며, 미술 작품과 작가들의 안전한 피난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한 아트 컬렉터의 행보는 유럽의 발달한 문화예술이 미국으로 이동하여 미국 문화예술 전반을 발전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페기는 그가 후원했던 작가들을 이주시킨 후 1941년 20여 년 만에 뉴욕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고 이듬해 뉴욕 금세기 미술 화랑(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개관했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의 전위예술, 그중에서도 초현실주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뉴욕 금세기 미술 화랑은 유럽의 수준 높은 현대미술을 미국에 소개했는데 이는 미국 현지 작가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잭슨 폴록, <Alchemy>, mixed media on canvas, 1947 (이미지 출처: http://www.guggenheim-venice.it)
지금은 그 이름이 하나의 브랜드가 된 작가이지만 초기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렸던 잭슨 폴록은 미국 태생의 작가로 페기 구겐하임의 지원에 힘입어 스스로의 작품 세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1943년 자신의 갤러리에서 연 살롱전을 통해 폴록의 작품을 처음 접한 페기는 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았고, 그를 "가장 강하고 흥미로운 미국 화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페기는 폴록을 금세기 미술 화랑의 전속작가로 삼아 아낌없는 후원을 해주었습니다. 전속작가라는 개념2)은 당시에는 매우 드문 사례로 그만큼 페기 구겐하임이 폴록의 작품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페기의 후원 덕분에 폴록은 생업으로 병행하던 목수 일을 그만두고 작품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뉴욕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꾸준히 개최해준 전시 덕분에 당시 미술계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와 해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 등의 평론가들의 눈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린버그는 자신의 에세이 <모더니즘 회화>를 통해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회화를 가장 바람직한 모더니즘 회화로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폴록이 흩뿌려진 물감의 추상적인 형상을 통해 ‘순수한 평면성’을 이룩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로젠버그는 폴록이 역동적으로 물감을 뿌리는 모습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말하며 그를 ‘액션 페인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끈 작가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저명한 비평가들의 호평을 등에 업으며 폴록은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유럽의 그늘에서 벗어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미국만의 미술사조라고 평가되는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페기는 자신의 첫 번째 업적을 잭슨 폴록이라고 말할 정도로 폴록의 예술적 성과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 외에도 마크 로스코, 윌렘 드 쿠닝 등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 화가들 역시 페기 구겐하임의 후원에 힘입어 작품 활동의 근간을 마련했습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국 미술의 주류로 자리 잡은 추상표현주의는 후에도 미국을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굳건히 버티게 해주었던 중요한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페기가 뉴욕을 떠나 이탈리아 베니스에 정착하자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미국의 진지한 젊은 작가들에게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던 페기가 미국을 떠난 것은 미국 현대미술계의 심각한 손실”이라고 말하며 컬렉터와 후원자로서의 그의 행적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2) 영국 미술을 부흥시킨 아트 컬렉터, 찰스 사치
좌: 찰스 사치 (이미지 출처: 구글) / 우: 사치 갤러리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20세기 중반부터 미국은 현대미술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지켜왔습니다. 이러한 위상은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유럽의 영향력 있는 아트 컬렉터들 역시 팝아트, 추상표현주의 미술로 대표되는 미국의 블루칩 작품을 수집하기를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영국 미술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YBA(Young British Artist) 작가들은 포름알데히드에 갇힌 박제 상어와 같이 발칙하고 파격적인 작품들로 영국 미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다면 이 젊은 작가들은 당시 미국에 치우쳐져 있던 미술계를 어떻게 사로잡았을까요?
데미안 허스트,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1991 (이미지 출처 : damienhirst.com)
데미안 허스트, 사라 루카스, 마크 퀸 등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스타 작가들로 이루어진 YBA, 이들의 성공 요인에는 찰스 사치라는 아트 컬렉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치는 현 사치 갤러리(Saatchi Gallery)의 대표로 그야말로 영국 미술계의 가장 유명한 슈퍼 컬렉터입니다. 이라크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영국으로 이주한 찰스 사치는 동생 모리스 사치와 공동으로 사치&사치라는 광고 회사를 설립하여 크게 성공시켰고, 이를 통해 얻은 막대한 경제력으로 광적인 현대미술 컬렉터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사치는 그의 컬렉션을 보존하고 사람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1985년 사치 갤러리를 개관했습니다. 그는 초기에는 대체로 미국 개념미술 작품을 수집해서 영국에 선보이는 전시를 열었지만, 점차적으로 영국 국내의 대학 졸업전시를 순회하며 작품을 구입하는 등 젊은 신진 작가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1988년 데미안 허스트의 주도로 이루어진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 졸업전 <프리즈(Freeze)>를 통해 젊은 작가들의 역량을 알아본 사치는 본격적으로 영국 신진작가들에게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졸업전시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구입하거나 젊은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있는 지역에 일부러 찾아가 그들의 작품을 사들였던 사치는 곧 이러한 신진 작가들의 작품들로 이루어진 자신의 컬렉션을 사치 갤러리에 전시하여 영국인들에게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마가렛 대처 정부가 정책적으로 예술가 지원금을 축소시킨 때였고, 때문에 젊은 작가들에겐 작품 구매와 같은 경제적인 후원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1991년 세상에 선보인 데미안 허스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은 실제 상어를 재료로 사용했다는 과감함과 감상자에게 전하는 철학적인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27살의 젊은 작가가 이렇게 거대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찰스 사치의 경제적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데미안 허스트가 이 파격적인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사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5만 파운드(한화 약 7,400만 원) 상당의 재료비를 지원했습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데미안 허스트는 스타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치는 이때 자신의 갤러리에서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한 사라 루카스, 마크 퀸 등 신진 작가들로 구성된 <Young British Artist(YBA)>라는 제목의 단체전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소장하고 있던 미국 미술 작품들을 팔면서까지 영국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한 사치는 지속적인 전시와 광고 회사를 운영하며 터득한 남다른 마케팅 기법으로 전 세계에 그들의 존재감을 알렸습니다.

현재 YBA 작가들을 통칭하는 단어의 유래가 된 <YBA>전을 시작으로, 1997년에 열려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던 <센세이션(Sensation)>전에도 역시 YBA 작가들의 파격적인 작품을 전시했고, 2003년에 런던 템즈강 부근으로 갤러리를 옮긴 뒤에도 개관전을 열어 자신의 소장품을 공개하는 등 꾸준한 전시 활동을 통해 젊은 작가들을 알리는 데에 일조했습니다. 그중 상어 작품을 통해 미술계에 충격을 안겨준 데미안 허스트는 영국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y)에서 조직된 미술상인 터너 프라이즈(Turner Prize)의 후보로 1992년에 처음 이름을 올렸고 3년 후인 1995년에 터너 프라이즈의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터너 프라이즈는 영국 미술의 대표적인 수상제도로 젊은 작가들의 등용문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부터 데미안 허스트, 레이첼 화이트리드, 트레이시 에민, 게리 흄 등 많은 YBA 작가들의 이름이 이 상의 후보자와 수상자 명단에 오르며 그들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특히 데미안 허스트는 2005년에 미술전문지 ‘아트리뷰(Art Review)’에서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1위로 선정되며 세계적인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받았으며 2014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예술가로 뽑히기도 하며 비교적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YBA 작가들의 성공 배경엔 찰스 사치의 과감한 후원이 큰 역할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데이비드 호크니와 프란시스 베이컨 이후 이렇다 할 작가를 배출하지 못해오던 영국 미술계에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한 다양한 젊은 작가들을 등장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트 컬렉터의 역할과 면모는 다양합니다. 젊은 작가들의 후원자로서 미술계에 변화를 이끌어낸 페기 구겐하임과 찰스 사치 역시 싼값에 산 작품을 비싼 값에 되팔면서 경제적 이윤을 남겼고 미술을 이용한 투기라는 비난을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적은 분명 아트 컬렉터가 가진 의미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비싼 미술작품을 사들여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넘어 사람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키워내는 문화 투자자로서의 아트 컬렉터를 보여주며, 작가들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문화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3) 한국의 컬렉터 문화
바람직한 미술시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미술시장을 이루는 핵심 3요소 작가(공급), 컬렉터(수요), 화랑(매개)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국내 미술시장의 문화는 1970년대에 도입되어 이후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급박하게 변화해왔고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불균형하게 이루어진 채 전개되어 왔습니다. 국내에 존재하는 화가들의 수에 비해 정작 실거래 되는 화가의 수는 1%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수치로 현저히 적었고, 미술품을 수집하는 컬렉터의 수와 계층도 한정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미술시장의 불균형이 생겨난 것과 컬렉터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한 이유로는 무엇보다 대중의 미술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미술품은 다른 장르에 비해 유일성과 희소성이 강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짧은 역사 속에서 생겨난 한국의 화랑 문화는 작품을 사고파는 것에만 집중해온 경향이 있었고, 이는 경제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특수한 재화인 미술품의 경제적인 가치만 부각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미술품이란 소장의 대상이 아닌 관람의 대상일 뿐이고 작품을 사들이는 행위는 경제적인 투기와도 같다는 이미지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2018년 화랑미술제 전경 (이미지 출처 : 화랑미술제 홈페이지 koreagalleries.or.kr)
1990년대에 이르러 국내에서도 경매와 아트 페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그전까지 화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미술시장이 조금씩 다원화되어 왔습니다. 공개적으로 미술품을 거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 경매 제도는 1980년대에 도입되어 국내 경매사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경매 문화를 형성하고 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특수 아트 페어가 생겨나며 미술작품을 거래할 수 있는 채널이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2011년에는 작품의 판매량이 전년 대비 증가했지만 반대로 판매 금액은 낮아졌다는 통계가 집계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고가의 작품이 아닌 중저가 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국내 미술시장에서도 전체적으로 대중화가 이루어ㅎ지고 있다는 추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좌: 박수근, 노상-관상 보는 사람 (이미지 출처 : 케이옥션)
우: 김환기, 3-II-72 #220(붉은색 전면 점화), 1972 (이미지 출처 : 서울옥션)
물론 여전히 한국 경매는 김환기, 박수근, 박서보 등 유명 작가들의 초고가 작품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론과 다양한 매체에서도 이러한 작품들이 얼마나 비싼 값에 팔렸는지에 대해서만 중점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작품가가 수억 원대에 이르는 작가 박수근 역시 젊은 시절 생활고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자신의 작품을 꾸준히 구매해주고 관심을 주었던 마가렛 밀러(Magaret Miller) 여사와 같은 후원자가 있었기에 붓을 놓지 않고 작업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현대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향한 대중과 컬렉터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실질적인 후원이 이루어져야 동시대 작가들의 다양한 시도들이 의미를 잃지 않고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갤러리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사람 (이미지 출처 : WIDEWALLS <Why Consider Investing in Art?>)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YBA 작가들을 가르쳤던 현대미술 작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Michael Craig Martin)은 사실 이들이 학생 때부터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줬다고 말합니다. 낡은 창고를 빌려 연 파격적인 졸업전 <프리즈> 역시 이들의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나무도 작은 씨앗으로부터 시작하고 이 씨앗에 물을 주지 않으면 나무는 자라나지 않습니다. 김환기와 박수근 같은 작가들에게도 무명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현재에도 훗날 위대한 작가로 성장할 젊은 작가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위대한 잠재력을 지닌 젊은 작가들이 붓을 놓지 않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그 노력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꾸준한 관심과 후원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또 다른 위대한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업 활동이 문화예술 전체를 한 단계 발전시킬 것입니다. 앞으로 국내의 신진 작가들을 후원하는 다양한 계층의 아트 컬렉터들이 생겨나 한국 미술계에도 건강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용어해설
1) 1915~1922년경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문명, 반합리적 예술운동.
2) 갤러리가 작가를 대표한다는 뜻으로, 해당 작가의 작품을 갤러리가 미술시장에서 독점적으로 공급 및 거래함.
참고문헌
[1]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페기 구겐하임, 민음사, 2009
[2] 20세기 미술과 후원 : 미국 모더니즘 정착에 있어서 구겐하임 재단의 역할을 중심으로, 윤난지, 서양미술사학회, 1994
[3] 찰스 사치의 현대미술 콜렉션 특성에 관한 연구, 정영숙, 한국예술경영학회, 2007
[4] 영국의 터너 상과 후원자들, 이정숙, 현대미술학회, 2009
[5] 빈약한 컬렉터 문화_예술을 부정하다-국내외 현대 미술계 컬렉터 문화의 비교와 문제점, 심재연, 미술세계, 2003
[6] 국내 미술시장 현황 연구 - 미술시장실태조사를 중심으로, 김봉수, 성신여자대학교 경영연구소, 2013
[7] 국내 미술시장에서의 아트페어의 역할과 발전방안 모색, 유성림,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2009
[8] Peggy Guggenheim과 Charles Saatchi의 컬렉션 비교 연구, 인가희, 경희대학교 대학원, 2007
[9] 페기 구겐하임에 관한 硏究 : 전후 미국미술 형성에 있어서 후원가, 수집가로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임정미,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0
[10] Melvin Paul Lader, “Peggy Guggenheim’s Art of This Century: The Surrealist Mileu and American Avan-Garde, 1942-1947”, Univ. of Delaware,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