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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A에서 열린 ≪공간 만들기 : 여성 작가들과 전후 추상주의≫展의 전시 전경 | 사진출처 : Artsy
지난 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공간 만들기 : 여성 작가들과 전후 추상주의≫展이라는 여성 추상 작가 그룹전을 개최한 것을 필두로 해외 메이저 미술관들은 앞다투어 여성 작가들을 내세운 특별전을 선보였습니다.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올해 초 ≪제1회 한국여성아트페어(KWAF)≫가 열리며,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전시가 첫 선을 보였습니다. 사실 과거에는 남자 작가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남성주의적 미술계가 활발하여 여성 작가들이 예술가로서 인정을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명성을 얻고 여성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알린 여성 작가가 있습니다. 이번 미술 이야기에서는 ‘여성’이나, ‘~의 연인’, ‘~의 뮤즈’가 아닌, 진정한 예술가로 탄생한 대표적인 여성 작가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까미유 끌로델> (1989) / <프리다 칼로> (2002) 영화 포스터 | 사진출처 : Daum 영화
미술사를 통틀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를 꼽자면 비운의 조각가 까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과 멕시코의 국민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라 가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통적으로 그녀들에겐 예술가였던 연인이 있었고, 각자의 연인과 얽힌 드라마틱한 삶은 영화로도 제작될 만큼 파란만장했습니다. 까미유 클로델과 프리다 칼로가 어떻게 젠더 의식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진정한 예술가로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19C 이전 여성 화가들 : 아카데미의 여성 화가
사실 까미유 클로델과 프리다 칼로 이전에 성차별을 뛰어넘어 미술사에서 명성을 떨친 여성 화가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화가의 딸이었으며, 아버지 아래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이들로 그 당시 아카데미1)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18세기 아카데미의 여성 화가의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의 화가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브룅(Elizabeth Louise Vigée-Le Brun, 1755-1842)과 영국인의 초상 화가로 알려진 안젤리카 카우프만(Angelika Kauffmann, 1741-1807)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모두 화가의 딸이었으며, 비제-르브룅은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카우프만은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성이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전문 화가로 활동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사실 18세기에는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여성 예술가에 대한 사회구조적 제약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가부장적인 사회로 직업 활동을 하는 여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회적 시선이 팽배했고, 여성들은 교육의 문제에 있어 평등하지 않았기에 공적 교육 기관이었던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비제-르브룅과 카우프만은 앞서 이야기한 모든 사회구조적 제약들로부터 벗어나 예술가로서 명성을 떨친 신여성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사회구조적으로 정형화된 여성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브룅,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782년
안젤리카 카우프만,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780-1785년
위의 작품은 각각 비제-르브룅과 카우프만의 자화상입니다. 그녀들의 자화상을 보면 자기 자신은 붓을 들고 있는 화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의복은 그 당시 사교계 여성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들은 자신을 마치 일반적 귀족 여성이나 양갓집 규수처럼 조신하게 표현한 반면에 당시의 남성 예술가들은 정신적, 예술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이를 토대로 그녀들은 일생 동안 예술가로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로서의 정체성과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녀들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표현할 때에도 '여성'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며, 이후 등장한 까미유 클로델과 프리다 칼로와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댕의 연인이기에 앞서 천재 조각가였던 까미유 클로델
흔히 까미유 클로델이라 하면 프랑스의 대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연인이자 뮤즈, 제자였던 여류 조각가를 떠올리곤 합니다. 현재까지도 로댕의 연인으로 더 잘 알려진 그녀는 어려서부터 조각에 소질이 뛰어났고, 예술가로서의 천부적인 자질과 열정이 가득했지만 로댕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유년 시절 까미유 클로델은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나폴레옹 흉상이나 다비드와 같은 제작이 까다로운 소조 작품을 완성해냈는데, 일찍이 딸의 조각가로서의 천부적인 소질을 알아차린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15세가 되던 해,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Alfred Boucher, 1850-1934)에게 정식으로 조각 기초 수업을 받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 국립미술학교2)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학교에서는 여학생의 입학을 거부했을 정도로 여성의 능력은 평가 절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며 사회적 제약에 굴하지 않고 조각에만 전념했고,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본 로댕은 그녀를 제자로 삼았다가 정식 조수로까지 채용하게 됩니다. 까미유의 탁월한 예술적 영감과 재능은 로댕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로댕의 작품 제작 활동에 있어 그녀는 없어서는 안 될 만큼의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특히 로댕의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1840-1917)과 <칼레의 시민(The Burghers of Calais)>(1884-1895) 제작에 그녀가 큰 기여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로댕과 연인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까미유는 <사쿤탈라(Sakuntala)3)>(1886-1905)로 1888년 살롱4)에서 최고상을 받고 조각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었는데, 이는 불과 4년 만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로댕과 동등한 위치에서 예술계의 동지이자 경쟁자의 관계로 성장한 것이었습니다.
<사쿤탈라(Sakuntala)> 제작에 몰두하는 까미유 (1887) | 사진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까미유 클로델, <사쿤탈라(Sakuntala)>, 대리석, 1886년-1905년
<사쿤탈라(Sakuntala)>가 출품되었을 때 평론가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까미유의 재능과 실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스승이었던 로댕이 그녀의 조각을 손 봐주었을 것이라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로댕은 아래와 같이 까미유를 유능한 동료 조각가로 치켜세웠습니다.
"클로델 양이 내 제자였던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소. 나는 그녀에게 의견을 묻고 비평을 들은 다음에 최종적으로 작업을 확정 짓습니다. 한마디 더 하지요. 그녀에게 황금이 묻힌 장소를 가르쳐준 사람은 나일지 몰라도, 황금을 찾아낸 것은 결국 그녀라는 것을 믿어주세요."
- 오귀스트 로댕 -
이후 로댕의 심한 여성 편력으로 두 사람은 결별했지만 오히려 그 일은 까미유에게 있어 작품 활동의 자유를 얻고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로댕과의 결별 이후에도 그녀는 작업에 매진하여 <중년(Maturity)>(1898)과 <클로토(Clotho)>(1893) 등의 역작을 완성하며 살롱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클로토(Clotho)>(1893)에서 로댕의 데생이 보인다는 평론을 실은 비평가에게는 잡지사에 직접 편지를 보내 해당 작품은 온전한 자신의 창작품이니 기사를 정정해달라 거세게 항의하며 작품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드러냈고 자신을 독립적인 예술가로 보지 않는 미술계의 시선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당대 거장으로 칭송 받으며 미술계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로댕의 견제와 방해로 인해 까미유 클로델은 198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그녀의 예술적 재능에 마땅한 미술사적 평가가 이루어졌지만, 그녀는 로댕의 제자, 로댕의 연인으로 남아있기를 거부하고 진정한 예술가로서 존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까미유 클로델, <중년(Maturity)>, 청동, 1898년
까미유 클로델, <클로토(Clotho)>, 대리석, 1893년
고통에 맞선 강인한 화가, 프리다 칼로
멕시코의 보물이자 20세기 페미니스트의 우상으로 대표되는 프리다 칼로는 자화상에 자신의 페르소나를 담아내며 당대 최고의 국민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났습니다. 자화상 속에서 그녀는 보석, 리본, 스커트 같은 화려한 여성의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때때로 남성의 복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의 콧수염과 두꺼운 눈썹 묘사를 강조하여 남성적 외양을 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프리다는 성(gender)에 얽매이지 않고 그녀 안에 내재된 양성적인 면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 프리다 칼로 -
프리다 칼로가 자화상을 주로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그녀는 어릴 때부터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고 있었고, 대학교 1학년 때 심한 교통 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신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프리다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고, 부모는 그녀를 위해 침대 지붕 밑면에 전신 거울을 설치한 캐노피 침대와 누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젤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관찰하며 스스로의 모습을 그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녀가 평생을 두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였습니다.
프리다 칼로, <벌새와 가시 목걸이를 한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40년
위 작품은 프리다 칼로의 대표적인 자화상입니다. 프리다가 활동했던 당시 유럽에서는 모더니즘 미술5)이 성행했고, 프리다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미술6)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평이 있으나, 그녀는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며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여 표현한 자화상들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녀의 예술 세계는 어느 한 사조에 속해있기보다는 프리다 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이자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 <프리다와 디에고(Frida and Diego)>, 캔버스에 유채, 1931년
21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한 멕시코의 국민 화가 디에고와는 여성 편력으로 인해 8년만에 결별을 하게 됩니다. <두 명의 프리다 칼로(The Two Fridas)>(1939)와 <짧은 머리의 자화상(Self-Portrait with Cropped Hair)>(1940)는 이혼 직후의 작품으로 디에고와의 이혼 후 그녀가 겪었던 고통과 슬픔이 잔상으로 남아있긴 하나, ‘~의 연인’, ‘~의 아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예술가로서의 존재 자체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돋보입니다. 특히, <짧은 머리의 자화상(Self-Portrait with Cropped Hair)>(1940)에서 프리다는 짧은 머리를 하고 짙은 색깔의 남성 양복을 입고 있습니다. 작품의 상단에 악보와 함께 써넣은 글은 "이것봐, 너의 머리카락 때문에 너를 사랑했는데, 이제 너는 머리카락이 없구나. 더 이상 널 사랑할 수 없지."라는 노래 가사로 연인, 사랑, 관습, 여성성 등 자신을 억압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독립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프리다 칼로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에 의해 여성이 억압되는 전통적인 관습을 거부하고 예술가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프리다 칼로, <두 명의 프리다(The Two Fridas)>, 캔버스에 유채, 1939년
프리다 칼로, <짧은 머리의 자화상(Self-Portrait with Cropped Hair)>, 캔버스에 유채, 1940년
까미유와 프리다는 유명 예술가의 연인이자 뮤즈였으나 그녀들의 예술적 능력은 남성 예술가 이상이었습니다. 여성과 예술가 사이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었던 비제-르브룅과 카우프만과 비교했을 때, 그녀들은 여성이기보다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자아의 내면 세계를 예술로 승화시키며 주체적인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들은 '여성 예술가'가 아닌 '예술가'로서 평가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연인, 아내, 혹은 뮤즈'라는 수식어를 제외하고 바라볼 때 비로소 그녀들의 작품 속에 있는 예술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프리다 칼로
서양 미술사에 까미유 클로델과 프리다 칼로가 있다면 한국 미술사의 진정한 첫 여성 예술가로는 바로 나혜석(1896-1948)이 있습니다. 나혜석은 우리 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서양 화가이자 근대적 여성 인권 사상을 지닌 운동가였습니다. 그녀는 여성들의 자유와 권위가 낮았던 1900년 대 초 예술 활동을 펼쳤던 선구적인 여성으로서 신여성의 효시라 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였던 남편과 이혼 후에도 나혜석은 조선미술전람회7)에 수 차례 입선하고, 여자미술학사8)를 설립하는 등 사회의 시선에 구애 받지 않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예술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애, 결혼,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심리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식민지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가 가지는 모순을 비판한 글 <이혼고백장>(1934)과 <신생활에 들면서>(1935)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신생활에 들면서>(1835)에서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려면 남성 자신부터 정조를 지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조라는 것은 남이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주체의 자유 의지에 속하는 취미의 문제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사회 구조적 모순과 제약을 훨씬 뛰어 넘었던 그녀의 행보는 진정한 예술가로 존재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나혜석,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28년
지금까지 까미유 클로델과 프리다 칼로가 유독 왜 이전의 여성 미술가들과는 달리 미술사에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탐구하여 그들의 작품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두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남성중심적 미술사에서 여성이기보다는 예술가로서 존재하고자 했습니다. 여성이라는 성(gender)에 구애 받지 않고, 각자 마주한 고통스럽고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예술 활동에 전념했던 그녀들의 모습은 오늘날까지 대중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들이 보여준 선구자적 면모를 바탕으로 이 시대의 모든 여성 예술가들이 더 이상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연인 등 누군가의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 예술가가 아닌 오직 예술가로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용어해설
1) 아카데미(academy)란 예술가, 문필가, 학자 등 전문가들로 조직된 단체의 총칭으로, 회화와 조각 등의 기법을 가르치는 미술 학교나 고등 연구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들의 이론은 원칙적으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에 입각해 있었으며, 아카데미의 창립이 성행했던 15-18세기 당시 미술에 관한 행정과 교육을 독점하고 미술 학교와 공식적인 전람회를 지배했습니다.

2)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즉 에콜데보자르(École des Beaux-Arts)는 프랑스 유일의 공적 미술 기관으로 가장 영향력이 크고 유명하여 들라크루아, 드가, 앵그르, 모네, 르누아르, 쇠라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3) 사쿤탈라는 마술에 걸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쿤탈라가 남편과 재회하는 이야기로 힌두교적 사상이 담겨있는 인도의 희곡입니다.

4) 살롱이란 현존하는 예술가의 작품을 모아서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공식의 전람회로, 1667년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제1회 살롱전이 개최되었습니다.

5) 모더니즘은 기존의 리얼리즘과 합리적인 기성 도덕, 전통적인 신념 등을 일체 부정하고,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도시 문명이 가져다 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반을 둔 미술을 포함한 다양한 문예 사조를 지칭합니다.

6) 초현실주의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와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의 예술 사조입니다.

7) 조선미술전람회란 1922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작품 공모전입니다. 약칭으로 선전(鮮展)이라 부르며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회를 거듭하였습니다.

8) 여자미술학사란 나혜석이 당시 한국 여성의 서양화 교육을 위해 1933년에 설립한 미술 교육기관으로, 양화 교육을 통해 전통과 구속으로부터 여성들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계몽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참고 문헌
1) 린다 노클린, 「왜 지금까지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는가?」, 아트뉴스, 1971
2) 휘트니 채드윅, 『여성, 미술, 사회 – 중세부터 현대까지 여성 미술의 역사』, 김이순 역, 시공사, 2006
3) 우정아, 「아카데미의 여성 화가들」, 서양미술 산책, 2010
4) 이주헌, 『화가와 모델』, 아트북스, 2007
5) 김정미, 「프리다 칼로」, 인물세계사, 2009
6) 이혜리, 『나 프리다 칼로』, 다빈치, 2004
7) 김서연, 「페미니즘 미술에서 나타나는 성(gender)표현에 관한 연구 : 프리다 칼로, 루이스 부르주아 작품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8)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9) 한국컨텐츠진흥원, 「나혜석」, 문화컨텐츠닷컴,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