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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영

Young

50점의 작품
50점의 작품
단체전
2021 키미포유 2021 'Wonderwall展' (키미아트갤러리, 서울)
2018 갤러리 램번트 ‘2018 우수작가展’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조선일보,서울디자인재단 ‘아시아프 2018’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서울)
2017 근영/김지혜작가 2인전 '지워지지아니하는 : 잔상展' (갤러리뮤앤하임, 서울)
서울모던아트쇼 (예술의 전당, 서울)
2015 원주한지문화제, DEFIER '잇다' (원주한지테마파크, 원주)
2012 (주)디자인하늘소 <반려展> '달달한 365일' (윤디자인갤러리, 서울)
수상/선정
2018 제16회 서울미술대상전 우수상 (서울미술협회)
2016 제3회 서울국제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 장려상 (서울미술협회)
기타
2017 마이아트 '디자인 아트페어' 디자인 너머 소재, 사물의 소리展 (예술의 전당, 서울)
(주)오씨메이커스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 2017’ (코엑스, 서울)
2016 광진문화재단 '뚝섬 팝아트 페스티벌' (서울)
(주)오씨메이커스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 2016' (코엑스, 서울)

작가의 말

우리는 우주의 반짝이는 별의 조각으로 태어나
운명이라는 낯선 여행길에 내던져집니다.

길 위에서 ‘나’라는 존재를 떠맡아 스스로를 창조해나가는 시간 동안
우리는 여기에 던져진 다른 존재들과 마주하게 되고,
그들은 ‘나’의 세계를 이룹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역학관계에서 우연 또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타자의 암시는
각자에게 <이름>이라는 몇 겹의 외피를 부여합니다.

그렇게 ‘나’를 둘러싼 과거의 이름은 현재의 ‘나’를 규정하며,
미래에 덧붙여질 이름의 지평을 열어 ‘나’를 가르치고,

겹겹의 이름들 속에서 시시각각 갱신되는 ‘나’는
존재의 수레바퀴를 늘 새롭게 더듬거리며 굴려댑니다.

외피 안에는 심연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외연과는 상이한 내면의 자아와
수치스러움의 빛이 매몰되어 있습니다.

그 내부의 빛은
세계를 향해 자신만의 신호를 발산합니다.

신호는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아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 가치를 가지지 않기에
파장이 맞는 존재에게만 그 가치를 드러내고,

마침내 표출된 자아는 한 겹의 은닉에서 벗어나
헤르메스의 날개를 달고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합니다.


오늘도 도시는 피고 지는 불빛들로 가득합니다.

그 빛은 ‘나’와 ‘세계’라는 존재의 내부에서 스스로 발산하는 빛이며
동시에 서로의 빛을 반사하는 빛입니다.


이면의 비밀을 지니고
매일 다른 모양의 빛을 반사하며 이 도시를 감싸 공전하는 달.

각양각색의 돌에 부딪히고 돌의 표피를 깎아내며 여기에서 저기로 흘러 떠나는 물.

부풀었다가 다시 가라앉는 물결의 호흡.


존재의 양태와 닮아있는 풍경들은
자못 낯설고 새롭게 여겨집니다.

길 위에서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의 배낭 안에 담았던 것들을 꺼내놓자면
변화무쌍하고 서로 어울리지 않는
무수한 낱말들의 나열처럼 보입니다.

이 피상적 이질감은
풍경에 몽롱한 허상의 빛을 덧씌우는 재료입니다.

정신세계의 심원함에 슬며시 기웃거리고,
허언과 같은 어조로 아는체하며,
모순된 자기 탐닉의 신호를 발산하는
‘나’와 ‘세계’의 교신의 창구입니다.

Q.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시차>. 시간이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질량에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정밀한 시계를 사용한다면 단 몇 센티미터만 고도를 달리하여도 시간의 흐름의 차이를 측정할 수 있다고 한다.

나와 외부 세계의 시계도 그저 '시간'이라는 명사만을 공유하며 제각각 흐르고 있었다.
웃어른들끼리 관계의 굴곡을 따라 잠드는 곳이 자주 바뀌었다.
활동적이셨던 아버지는 가벼운 수술을 받으려다 의료사고를 당하며 건강을 크게 잃었다. 이어진 1997년의 IMF 외환위기, 가족의 해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우연한 의지와 사건들이 바깥에서 불어오며 시계 초침을 붕붕 돌려댔다.

나는 언제나 반쪽짜리 시계를 목에 걸고 여기저기를 떠밀려 다니는 이방인 같았고,
그런 스스로에게 있어 존재 확인의 문제는 퍽 절박한 요소가 되었다.

"나는 왜 나여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 얼른 대답을 들려준 것은 창작이었다.
새로 적응해야 하는 공간에서 꺼내든 스케치북이, 덜 자란 손에 들려진 경시대회의 상장들이,
때마다 나에게 잠시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마련해 주었다.
타자의 평가로 매겨지는 자기가치의 확인. 거기까지였다. 그 너머 무언가를 발견할 틈도 없이 나의 반쪽짜리 시계는 바람에 휩쓸려 그치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2008년, 새해의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을 무렵 나는 ‘또’ 다른 직업을 찾고 있었다. 하고 있던 영업 업무가 맞지 않아 영 실적이 나오질 않았고, 벌이를 멈출 수는 없었기에 이직 준비와 양립할 수 있는 파트타임 잡을 구해야 했다. 그렇게 ‘당장 할 수 있는 일’ 중에 시간 조절이 용이하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선택한 타로 리딩의 경험은 현재 창작활동의 모티베이션이 되었다.

<타로 카드>란 카드의 이미지 속 상징들을 해석하여 어떤 문제의 해답이나 미래의 길흉 따위를 예측해보는 점성술의 일종인데, 당시에는 <타로 카드>가 진지한 점술적 도구로서의 의미보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여흥거리에 가깝게 여겨지는 경우가 더 많았고, 멀티플렉스나 축제가 열리는 행사장 등의 장소 한켠에 이벤트성으로 벌여둔 <타로 카드>노점들이 흔하게 유행하였다.

겨울에는 천막 사이로 새어드는 찬 공기에 발이 얼던 두 평 남짓한 노점.
그곳에서 나는 78장의 각기 다른 이미지들의 배열이 제시하는 내러티브에 스스로를 투영하는 수많은 얼굴들을 마주하였다.
테이블 위에 병치된 이미지 속 각각의 상징체계들을 자신의 존재와 관련시키고,
그들이 그것에 몰입하였을 때, 이미지는 그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요구에 응답한다.
색채와 이미지가 가지는 잠재력을 떠올릴 때면, 몸속 어딘가에서 딸깍 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2012년 겨울, 내가 그린 미숙한 이미지가 삽화로 실리고, 전시장에 걸렸다.
그리고 몇 걸음 뒤에 서서 벽에 걸린 나의 그림과 관람객의 뒷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
아주 낮은 고도의 심연에서 창작을 갈망하며, 외부 세계와의 시차를 두고 느릿느릿 흐르던 나의 시계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반쪽짜리들이 마침내 서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Q.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되도록이면 아주 오래전 내 유년 시절의 처음까지. 아니, 더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소설 <데미안(Demian)>(1919) 서문의 첫 구절이다.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는 일.

최근 한국 사회의 젊은 층을 중심으로 “MBTI 성격 유형검사”가
(마이어스-브릭스 유형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로, 카를 융의 심리 유형 이론을 토대로 하여 고안된 16가지 성격 유형 검사)
화제가 되며, “MBTI 유형별 궁합”, “MBTI 유형별 반응” 등과 같이 성격유형 사이의 관계성이나 행동 양상을 특정 짓는 오락성 지표들까지 함께 등장하였다.

개인의 기질, 성격 등을 유형화 시키는 ‘유사과학’과 같은 고정된 관념의 유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혈액형별 성격 특징”이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며 관련 콘텐츠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 외에도 별자리별 성격, 띠별 성격‥
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붕어빵을 꼬리 부분부터 먹느냐, 머리 부분부터 먹느냐에 따른 성격유형의 구분까지 있었더랬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나’를 대신 이야기해주는 매체에 매료되는 것일까?
이러한 유형별 분류에의 의존이 마치 사회적 낙인과 같이 내면화된다면, 도리어 진정한 자신을 억누르는 페르소나가 한 겹 덧씌워지는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보다 명확하고 가시적인 형태로 ‘나’ 와 마주하기를 모색한다.

사람의 본성은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리얼리티’만으로는 포착될 수 없다.
소설 <데미안(Demian)>의 구절처럼, ‘나’의 아득한 근원으로 되돌아가본다면 ‘나’를 알 수 있을까.
그 길로 갈 수 있는 촉매제는 무엇일까.

한국인에게 모자 쓴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들로 친숙한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는
“우주에는 달이 한 개뿐이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달을 본다.”라고 말했다.
달은 하나의 이미지에서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위성으로, 까맣고 파란 하늘에 톡 찍어놓은 점으로, 소원을 빌어보는 머리 위의 신상(image of god)으로, 각각의 시간과 각각의 공간에서 수십억 가지 이상의 의미로 조각난다.

“이미지의 시적 효과”
나는 서술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단어나 구문의 조합으로 시적 언어가 만들어지듯,
단편적 이미지의 우연한 배열이 만들어내는 피상적인 연상이 우리의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과 감성을 이성에 의해 통제 받지않는 상태로 연결시켜 준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재현적 이미지 속에서 선, 형태, 색채 등의 요소가 주제의 결말을 정의 내리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그 불안정한 긴장감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신을 일깨워줄 수 있다면…

그렇게 깨어난 정신이 ‘나’의 뿌리를 타고 순환하면,
현재가 열리는 순간 과거의, 미래가 열리는 순간 현재의 진정한 ‘나’에게서부터 솟아오르는 암시를 붙잡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Q. 주로 사용하시는 표현 방법과 스타일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와 ‘나를 이루는 세계’의 수많은 조각들 중 몇몇이 만나 단편을 이룰 때, 나는 비어있는 캔버스와 눈을 맞춘다.
나의 의식 위로 영사되는 단편의 가장 가시적인 부분을 포착하여 스케치를 마치고, 초벌의 물감을 올리는 순간까지도
처음 포착된 지점에서부터 조금씩 외형을 비틀며 그려지는 조각들의 궤적은 마침내,
실재와 환상의 충돌과 교합으로 완성된 장면이 되어 캔버스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림 속에서 규정지어져 있던 관계와 위치, 중첩되는 의미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움직인다.

번외로, 나는 이러한 작업들의 잔상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에는
그저 담백하게 인식되는 실재를 왜곡 없이 표현하며 스스로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내가 세상과 관계 맺었던 순간들 속에 머무르던 색채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며
내면의 빈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이렇게 그려지는 그림에는 '습작'이라 이름을 붙이곤 한다.

Q. 가장 애착이 가거나 특별한 작품이 있으신가요?
모든 작품 하나하나가 특별하지만 <salvation (2017)>을 처음 공개했던 전시에서,
작업하는 동안 작품에 쏟았던 나의 에너지와 관람객의 감정이 맞닿았던 인상 깊은 순간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여러 작품을 셀렉 할 수 있는 전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꼭 <salvation (2017)>을 걸었다.
<salvation (2017)>은 나의 작품 중 가장 많은 관객과 만난 작품이다.

Q.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순간순간 떠오르는 감정, 경험, 생각들을 적어두곤 한다.
이러한 것들 중 몇 가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맴돌다 주제를 지닌 흐릿한 이미지로 합쳐지면,
이때 다시 메모나 사진들을 뒤적이며 이미지의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탐색한다.

Q. 앞으로 작업 방향은 어떻게 되시나요?
‘1인 1디지털 기기’의 시대이다.
오늘날 저마다의 손에 일상적으로 들려져 있는 휴대폰의 카메라는 많은 것의 변화를 주도하였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 형식이 다원화되며 변모해온 예술 역시, ‘스마트 기기를 통하여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구’를 적극 수용하였다.

이러한 시대 변화 속에서 예술의 미학적, 사회적 위상은, 전시장의 예술작품을 관람하는 수동적 미적 체험에서 관람객과 예술작품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쌍방향적 참여 형태로 새로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드물게 열리는 기획전시나 유명 박물관, 미술관을 방문해야만 감상할 수 있었던 거장들의 예술 작품들은, 미디어아트로 재구성되어 다양한 전시에서, 보다 ‘가까운’형태로 그 모습을 선보이며 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들의 작품 속 색채와 터치들이 디지털 화면의 픽셀로 물결쳤고, 관람객들은 그 앞에서 예술과 함께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증샷’으로 남겼다.

그날, 붓이 닿은 흔적 하나하나로 내 전신의 감각을 저리게 하던 거장의 작품은
스크린 속에서 화려하게 재현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고전의 섬광으로 남았다.

‘참여전시’시대에서 회화의 평면성은 대형 스크린이 둘러싸고 있는 3차원적 공간에 압도되고 마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평면적 회화가 보유하고 있는 순수한 미적가치를 탐구한다.
색채가 가진 고유한 성격과 농도, 붓 터치로 표현된 리드미컬한 선의 율동과 같이
순수한 형식의 예술로서, 시각적 감각 능력에 의해 감지되는 조형요소들.
나는 이 요소들을 나의 모티브로 구성된 ‘눈꺼풀 이면’의 이미지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 정서와 상응하는 조형 요소들의 결합을 평면 회화의 환영적 잠재성을 품어내는 캔버스의 화면과,
색채 사이에서 종속적으로 드러나며 촉각적 연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거울의 표면과 같은 평평한 매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평면적 회화의 순수성이 평면 너머 또 다른 공감각의 세계로의 초청자가 되어 시대에 말 걸 수 있기를 기대한다.

Q. 대중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워지지 않고 이따금씩 찾아 듣게 되는,
마음을 울리는 가사로 노래하는 목소리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고 싶다.

Q. 작품 활동 외에 취미 활동이 있으신가요?
물을 보거나 잠기는 것을 좋아한다.